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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누린인사 작성일26-09-04 00:52 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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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많은 삶의 끝에 경남 산청에 정착해 딸기 재배를 하고 있는 김명실 씨. 지난해 봄과 여름, 경남 산청은 기록적인 재난을 두 번이나 겪었다. 3월에 발생한 산불은 축구장 4700개 규모의 면적을 태우고 9일 만에 진화됐다. 4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화마가 지나간 지 넉 달 뒤, 이번엔 평생 본 적이 없는 수마가 산청을 삼켰다. 단 3일 동안 600㎜가 넘는 비가 쏟아졌고, 닷새로 범위를 넓히면 강우량이 800㎜가 넘었다. 산청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비’가 내린 것이다. 폭우로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평화롭던 마을들을 덮쳤다. 사망·실종자만 15명이 나왔다. 논과 밭, 비닐하우스도 완전히 파괴돼 많은 농민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산청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비가 그친 다음 날, 무릎까지 차오른 감탕 속에 뛰어들어 열심히 삽질하는 여인이 있었다. 연면적 3000평이 넘는, 20여 동의 비닐하우스는 흙탕물에 흔적만 남았다. 각종 설비는 침수돼 고장이 났고, 관수 호수는 꼬여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하우스에 가득 찼던 딸기 모종들, 포트당 수천 원씩 주고 사 왔던 그 많은 재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올해 농사를 다 망쳤다”고 절망해 며칠 드러누워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재난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올해는 망했지만, 그에겐 내년이 있었다. 50여 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런 고난은 수없이 넘어왔다. 넘으면, 아니, 어떻게든 넘어야 낙이 온다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저라고 왜 눈앞이 깜깜하지 않았겠습니까. 피해 현장을 보는 순간 통곡이 났지요. 가을에 아들 장가보내려고 했는데, 수해 때문에 2년이나 늦춰졌습니다. 홍수 뒤 폭염 속에서 하루 종일 삽질하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지금까지 1년째 치료를 받습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불굴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에게 산청은 단순한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북한과 중국에서 수십 년 동안 피눈물을 쏟으며 살던 끝에 마침내 찾은 천국이었다. 이런 외진 곳에도 탈북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산청의 어느 골짜기에서 김명실 씨는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딸기 뿌리와 함께, 그의 삶의 뿌리도 。。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있다. 딸기 농사를 시작하던 초기의 김 씨 모습. 중국에서 워낙 많은 농사 일을 했어도, 딸기 농사는 생소했다. ● 결혼 못 하는 처녀들 1973년 김 씨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문천이었다. 그의 부모는 1950년대 후반 중국 옌볜(延邊·연변)에서 살다가 가족의 반대를 피해 ‘사랑의 도피지’로 북한을 택했다. 그래도 부친이 옌볜대학을 졸업한 인재였기 때문에 북한에 와서도 문천의 한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할 수 있었다. 김 씨 위로 오빠가 셋이나 있었는데, 막내이자 외동딸이라 어렸을 때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도 공장에 다니며 맞벌이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배고픈 기억도 거의 없다. 다만 부모의 가족은 전부 중국에서 살고 있었기에 친척이 없어 서러웠던 기억은 많다. 활달하고 체육도 잘했던 김 씨는 학교에서 학급 부반장으로 선출됐을 만큼 인정도 받았다. 1990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땐 대학 추천도 받을 수 있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녹내장이 심해져 치료비로 돈을 많이 써야 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아버지가 5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늘 술을 먹고 북한 체제를 욕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북한으로 도망을 온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돌아보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유가 울화병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듯했다. 김 씨는 자라면서 동네에서 60세가 넘은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 동네 남성들은 대개 60세 이전에 사망했다. 여성은 간혹 60세를 넘겨 살기도 했지만, 70세를 넘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고향은 사람들이 단명하는 동네였다. 나중에 김 씨의 어머니도 6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숨졌다. 중학교를 졸업한 김 씨는 인근 9월21일제련소에 취직했다. 문천에는 일제 강.기 때부터 가동된 노동자 5000명 이상이 종사하는 문평제련소가 있었고, 길을 사이에 두고 3000명이 일하는 새로 생긴 9월21일제련소가 있었다. 문평제련소는 너무 낡았고 구내에 중금속 먼지가 가득했지만, 김 씨가 일한 새로 생긴 제련소는 그 정도로 더럽진 않았다. 2004년엔 남포제련소를 없애고 시설을 옮겨와 새로 지은 아연 제련소가 또 생겨났다. 제련소들에선 금, 은, 동, 연(납), 아연, 납, 유황 등을 수만 톤씩 뽑아냈는데, 어디서 오는지 모를 화물열차들이 계속 들어와 광석을 쏟아냈다. 먹고 살기 힘든 북한에선 환경오염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백경게임다운로드 . 제련소가 열심히 돌아가면 여기저기 굴뚝들에서 뿌연 연기도 쉼 없이 나온다. 아황산가스, 수은을 가득 머금은 죽음의 연기이다. 외부인이 문천에 가면 지독한 공기 냄새 때문에 코부터 막아야 하지만, 문천 사람들은 습관 돼 아무렇지 않아 한다. 납, 아연 제련 과정에 나오는 카드뮴은 제련소 폐수에 섞여 땅속에 들어가 이타이이타이병을 만든다. 제련소에서 반세기 넘게 공해 먼지가 쏟아져 나온 터라 문천은 땅의 색깔도 다른 지역과 달랐다. 인근 농장에선 제련소 때문에 옥수수와 벼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았지만, 당국에 그 불만을 쏟아내기도 어려웠다. 산에는 풀들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가축들도 키우기 어려웠다. 바다 역시 오염돼, 바닷가에 자리 잡은 도시지만, 배들도 많지 않았다. 제련소엔 여성들이 많았다. 40세가 넘는 노처녀들도 많았는데, 제련소에서 일하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소문이 나서 결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나마 5년 미만 일한 여성은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22세 이상이 되면 。. 짝을 찾기 힘들었다. 실제로 시집가도 애를 낳지 못하는 여성이 많았기에 이런 기피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연을 전해하는 일을 하는 여성들은 제련소 안에서도 제일 기피되는 결혼 대상자였다. 김 씨는 연 가스를 마신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공장 안엔 연 제련 과정에서 나오는 가스가 꽉 차 있었는데, 실수로 꼴깍 삼키면 목구멍 안에 달달한 느낌이 전해졌다. 금과 은처럼 당에서 특별히 통제하는 귀금속 직장은 가스가 더 많이 찼다. 금 따로 연 따로 제련하는 것이 아니라, 연을 뽑으면서 금도 생산하기에 두 공정이 합쳐져 있는 것이다. 금·은 직장은 종업원이 100% 남성이었다. 이들은 출퇴근 때마다 알몸으로 몸수색을 받았다. 가끔 금을 삼키고 나오다 잡히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에서 금은 김 씨 일가의 당 자금으로 일반 사람이 여기에 손을 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중죄였다. 금 직장은 무장 경비대가 삼엄하게 경비를 섰다. 같은 제련소 사람도 울타리 안을 볼 수가 없었다. 생산된 금은 일정한 주기로 무장 호송대가 와서 싣고 갔다. 정갈한 하우스 안에서 김 씨가 재배하는 딸기들이 먹음직하게 익어가고 있다. ● 고난의 행군과 제련소 김 씨는 ‘연전해직장’ 압축기 운전공으로 일했다. 연 생산 공정에 바람을 보내주는 일이다. 김 씨는 작업장과 따로 떨어진 압축기실에 근무했던 까닭에 가스를 많이 마시지 않았다. 비록 결혼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제련소에 다니는 여성들은 기가 죽지 않았다. 문천에서 제련소에 입사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김 씨 동창 중에서도 제련소에 입사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모두가 제련소를 원했지만, 입사 경쟁률은 상당히 높았다. 그 이유는 제련소 사람들에겐 배급이 꼬박꼬박 나왔기 때문이다. 제련소 외의 다른 공장은 배급이 중단될 때도 있고 밀렸다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제련소 사람들은 100% 입쌀로 배급을 정량 공급 받았다. 그 외에도 각종 명절 때마다 설탕과 기름, 조미료가 1㎏씩 나왔고, 생선도 가끔 공급이 됐다. 이 정도 공급은 북한에선 최상위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천에서 제련소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절이 증명했다. 제련소 외에는 별다른 돈 벌 길이 없는 문천에선 특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기차역과 거리에서 시체들이 뒹굴었다. 아이를 기차역과 장마당 인근에 버리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김 씨도 이때 시신을 참 많이 봤다. “남자들과 아이들이 제일 먼저 죽었어요. 여성들은 어떻게든 버티더라고요.” 이런 아사 사태 속에서도 문천 제련소 종업원들은 굶어 죽지 않았다. 여전히 100% 입쌀 배급이 이뤄졌다. 생존 앞에선 결혼 같은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젊은 여성들이 제련소에 들어오겠다고 줄을 섰지만, 실제 입사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제련소 배급이 유지된 이유는 이들이 생산하는 비철금속이 북한의 핵심 외화벌이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금과 은처럼 귀금속은 말할 것도 없고, 연이나 아연도 90% 이상이 중국에 수출됐다. 제련소가 멈춘다는 것은 당국이 달러를 버는 길이 막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철금속을 팔아서 번 외화 중 일부는 제련소 종업원들의 배급으로 돌려졌다. 제련소에서 일할 때 김 씨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김 씨의 배급 덕분에 어머니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분가해 따로 살던 둘째 오빠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식량을 구하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바일 사이트 바다이야기게임 . 어느 기차역에서 이름도 없이 시신으로 발견돼 이름도 없이 묻혔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그때는 그랬다. 문천 기차역에서도 아침마다 역 안내원들이 출근해 첫 일과로 역 앞에서 발견된 시신을 치우는 일을 했다. 시신에 신문 한 장 덮어 놓으면, 좀 있다가 손수레가 와 시신을 가마니로 둘둘 말아 어디론가 싣고 가 대충 묻어버렸다. 그 사람이 누군지 관심이 없었다. 우편마저 마비됐으니, 멀리 타지에 사람이 죽었다고 통보해 줄 방법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내일 당장 내가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그런 성의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나중에 김 씨는 중국에서 죽은 돼지 사체를 묻는 것을 보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래도 중국 돼지는 북한 사람보단 깊이 묻어주는구나.” 3년 전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간 김 씨. 남편은 항상 그의 곁을 믿음직하게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 “너도 중국에 도망가.” 김 씨는 22세에 결혼을 했다. 노처녀로 제련소에서 늙어갈 운명은 벗어난 것이다. 상대는 함북 회령에 사는 숙모가 소개했는데 실은 중매를 한 다른 속셈이 있었다. 김 씨의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중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를 두만강 옆인 회령에 데려다 놓고, 그를 앞세워 중국 친척들과 연계를 가진 뒤 도움을 받으려는 계산이었다. 김 씨의 큰아버지, 삼촌들이 모두 중국에 있었다. 외가까지 손꼽으면 친척은 훨씬 더 많았다. 김 씨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 김일성 사후 3년 동안 애도 기간이라며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평소보다 좀 푸짐하게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어느 정도 지나자 김 씨는 남자를 잘못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군에서 생활을 잘 못해 조기 제대된 사람인데, 술주정뱅이에다 쩍하면 아내를 때리는 버릇이 있었다. 북한은 이혼도 해주지 않는 곳인지라, 처음엔 참으려 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김 씨도 고춧가루도 팔고, 약도 팔면서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밑천을 마련해 볼까 싶어 한 번은 중국에 몰래 건너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여자와 야반도주해 가문에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찾아간 친척들은 모두 냉담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좀 나았을 진 모르겠지만, 이미 부친도 사망한 이후였다. 그렇다고 친척들이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친척 집에서 그는 이름도 모를 각종 음식을 푸짐하게 먹긴 했다. 그렇지만 처음 찾아온 조카에게 100달러만 쥐어 돌려보냈다. 뇌물을 주고 매수한 국경경비대원은 약속한 새벽에 다시 북한으로 건너온 그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다들 다시 돌아온다고 하고 가긴 하지만, 실제 돌아오는 사람은 처음 봤소. 바보 아니오? 다들 도망가는데, 여긴 왜 또 돌아오지?” 이후에도 그는 중국에 한 번 더 갔었는데, 친척들의 냉담한 태도는 여전했다. 아니, 이번엔 거지 취급까지 당했다. 돌아오면서 그는 “다시는 친척 집에 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남편의 폭력은 .。 더 심해졌다. 1997년 회령에 찾아왔던 어머니는 딸이 사는 상황을 보더니 조용히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뭐가 못나 이렇게 매 맞고 살고 있니. 다들 중국에 가는데, 너도 중국에 도망가.” 이미 중국을 두 차례나 가면서 풍족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온 그는 어머니까지 그렇게 권고하자 마음을 굳혔다. 탈북은 가정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올해 동해 바다를 찾아 휴식의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 “네 몸값은 네가 벌어라.” 1998년 음력설에 25세 김 씨는 두만강을 넘었다. 몸에 말린 명태 네 마리를 품고 강을 넘었다. 어차피 어느 집에 찾아가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명절에 빈손으로 들어가기보단 중국에서 귀하다는 명태라도 내놓으려 했다. 추위 속에 떨며 두만강 얼음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니 멀리 불빛 하나가 보였다. 그 불빛을 목표로 걸어가니 집이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부부는 이상하리만치 살갑게 대했다. 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이제 아무 걱정도 마시오. 중국에서 잘 살게 우리가 도와주겠소.” 다음날 택시가 와서 그를 태우고 떠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중국돈 5000위안에 팔렸다. 물론 그도 자신이 팔려 간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이미 북한에도 여성들이 중국에 건너가면 한족들에게 팔려 간다는 소문이 많이 퍼져 있었다. 큰아버지, 삼촌, 사촌 형제들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머리를 흔들었다. 차라리 한족에게 팔려 갈지언정 친척들에게 가서 다시는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용의눈게임 . 그가 도착한 곳은 지리(吉林·길림)성 위수시라는 곳이었다. 창춘과 하얼빈 사이에 있는 지역인데, 창춘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넘게 가야 하는 농촌이었다. 위수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곡창지대다. 옌볜만 봤던 그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중국에도 초가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이라고 나타난 남자는 한 살 위의 한족이었는데, 밤에 이불에 오줌을 쌀 정도로 지능이 떨어졌다. 어차피 남자에게 뭘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라 그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한집에 살고 있는 시부모였다. “우리가 널 5000위안에 사 왔으니, 열심히 벌어서 그 돈을 다 갚아야 한다.” 네 몸값을 네가 일해서 갚으란 의미였다. 빚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노동력이 변변치 않은 집인지라 다른 빚도 많았다. 그렇지만 중국어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중국어 배울 때까진 여기서 어떻게든 버텨보자.” 시댁이 갖고 있는 10헥타르가 넘는 농경지 경작이 그의 어깨로 넘어왔다. 농기구도 없었고, 말이 한 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말 한 마리를 갖고 그는 어깨가 벗어질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벼·옥수수·콩 등을 닥치는 대로 경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댔다. “저 집은 뭔 복이래. 저렇게 곱게 생겼는데, 일까지 잘하는 조선 여자를 데려오다니.” 그가 너무 일을 잘하다 보니, 같은 마을에서 그를 신고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서 6년을 일했다. 빚도 다 갚았다. 이런 삶을 언제까지 더 살아야 하는지 앞이 깜깜할 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원래 공안은 그를 체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신고받고 갔다가 허탕을 치자, 애꿎은 그를 대신 잡아간 것이다. 2004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딸기 모종을 재배하고 있는 김 씨. ● “다시는 잡혀 오지 말아.” 2004년은 탈북한 여성들이 특히 많이 체포돼 북송된 해였다. 그해 북한은 탈북 여성을 체포해 북송하면 숫자에 비례해 통나무를 중국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이 없어도 잡아 북송시켜야 하는데, 체포에 따른 인센티브까지 챙겨준다니 공안들이 열심히 탈북 여성들을 잡아들였다. 2004년에 북송된 탈북 여성은 3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김 씨가 함북 온성보위부에 끌려가니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여성이 감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인권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남자 보위원들이 여성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옷을 홀딱 벗긴 뒤 알몸 검사를 시작했다. 보위원들은 가로·세로가 10㎝인 두꺼운 각목을 방마다 가득 세워놓고 있다가 기분이 나쁘면 사정없이 구타했다. 김 씨는 보위부 구류장에서 얼마 있지 않았지만, 여성 2명이 각목에 맞아 숨지는 것을 목격했다. 김 씨는 구류장에서 갓난아이를 중국에 둔 채 잡혀 나와 젖이 퉁퉁 불어 우는 젊은 여성을 알게 됐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도움을 주려 했다. 그에겐 500위안이라는, 북한에선 거액인 돈이 있었다. 아무리 보위원들이 옷 혼솔까지 수색했어도, 또 돈을 삼켰을 경우를 대비한다고 여성들이 용변을 보는 것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도 그 돈을 찾아내진 못했다. 김 씨는 북송될 위험에 대비해 500위안을 숨긴 신발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신발 밑창과 깔창 사이에 돈을 깔고 재봉기로 감쪽같이 꿰맨 뒤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북송될 때 그 신발을 신고 나왔다. 구류장에선 신발을 신지 못하게 했다. 보위부에 들어올 때 신발은 압수돼 다른 창고에 있었다. 김 씨는 아이 엄마에게 “이제 여기서 나가 도 집결소로 이송될 때 돈을 꺼내 좀 줄 테니, 그걸로 다시 탈북하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호의는 고발로 돌아왔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기 엄마가 보위부에 그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55번 나와.” 고함에 따라 나가니 어느 방에서 보위원 두 명이 각목을 손에 쥐고 노려보고 있었다. “돈을 숨겨 왔다면서…. 이제라도 순순히 내놓으면 용서해 줄게.” 버텨봐야 승산이 없다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그는 신발을 찾아 돈을 내놓았다. 돈을 보자 보위원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하지만 당사자의 허락이 없이 돈을 뺏었다간 나중에 어떻게 신고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갑자기 보위원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앉을 자리도 없이 콩나물처럼 살던 감방에서 나오게 하더니 사람 몇 명 없는 특별 감방에 넣어주었다. 인근 회령에 있는 숙모에게 연락도 해주고, 한 번도 때리지도 않았다. 강제노동 수용소에 가서 노역하고 있을 때 숙모가 찾아왔다. 돈의 힘이 작용한 것인지, 병보석으로 특별히 집에 가라고 허가도 했다. 물론 나올 때 돈은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북송 3개월 만에 그는 회령 숙모의 집에 돌아왔다. 다른 북송 탈북민이라면 생각도 못 할 결말이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이미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야마토3게임 . 숙모의 집에서 20일 동안 몸조리를 하면서 지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붙은 보안원(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 또 갈 거지? 이번엔 더 깊은 곳에 가서 다신 잡혀 오지 말아.” 북송된 여성들이 다시 탈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안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김 씨가 재배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딸기 상품들. ● 폐광에 나타난 젊은 여인 석방 20일 뒤에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살던 곳으로 찾아가니 시부모가 그를 내쫓았다. “여기 있어 봐야 또 잡혀갈 거니 집에서 나가. 네 남편은 데리고 가.” 빚도 갚았으니 아쉬울 것도 없고, 이참에 건사하기 힘든 남편도 떠넘기려는 속셈이었다. 하얼빈의 한 공사장에 가서 일자리를 구했다. 52명의 인부 밥을 하는 조건으로 월 500위안을 받았다. 낯선 환경에 와서인지 남편은 매일 저녁 이불에 오줌을 쌌다. “내가 부모도 버린 자식을 거두며 왜 이렇게 살지.” 그때는 이미 중국어도 잘할 수 있어서 어디 가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는 홀로 공사장을 떠났다. 다음에 간 곳은 헤이룽장(흑룡강)성 가목사시였다. 먹고는 살아야 했지만, 국적이 없었던 그가 변변한 일자리를 얻긴 어려웠다. 그가 찾은 일은 폐광에서 석탄을 캐는 것이었다. 그 지역엔 일제 때 석탄을 캐다가 폐광이 된 탄광이 많았다. 지역 정부에선 접근하지 못하게 했지만, 그래도 적잖은 사람들이 공안의 눈을 피해 몰래 폐광에 들어가 석탄을 캐서 팔았다. 채굴 설비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45도 각도의 경사 갱도를 타고 1000m쯤 올라가 곡괭이로 파낸 석탄을 배낭에 메고 다시 나왔다. 갱도 높이가 워낙 낮아 키가 167㎝인 그는 천정에 계속 머리를 부딪쳤다. 하루 종일 메고 나른 석탄은 1톤당 150위안에 팔렸다. 하루 종일 갱도를 오르내리다 보면, 기침할 때마다 목구멍에서 석탄 가루가 나왔다. 그래서 폐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김 씨도 술로 하루하루 힘든 삶을 이겨냈다. 가끔 공안이 단속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르르 도망을 갔다. 다행히 김 씨는 한 번도 잡힌 적은 없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봐도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그때 하도 허리를 혹사해서인지, 지금도 허리 때문에 고생한다. 한국에 와서 병원에 가니 의사가 “정말 보기 드물게 든든한 허리를 타고났는데, 이리 좋은 허리가 망가질 때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했냐”고 묻기도 했다. 32세의 젊은 여인이 혼자서 버티기 힘든 삶이었지만, 다행히 그를 좋아하는 한족 남성을 알게 돼 이 시절을 함께 했다. 2006년 둘 사이에 딸도 태어났다. 하지만 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도 술을 마셔서인지, 새로 만난 남성은 2009년에 간경화에 걸려 사망했다. 세 살이 된 딸과 함께 그는 다시 세상에 홀로 남았다. 그때부터 2017년까지 그는 중국에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농사에도 도가 텄고, 식당이나 공사장에서 온갖 일들을 다 해봤다. 2017년 하나원에서 같이 온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 산청의 맏며느리가 되다 한국에 오기 3년 전쯤, 예전에 중국에서 언니처럼 알고 있던 탈북 여성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한국에 와 있는데, 너도 와. 그런데 브로커를 통해 오려면 6000위안이 필요해.” 어린 딸까지 키우며 사는 그에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한국에 와서 돈을 주기로 하고 온 탈북민이 대다수였지만, 외진 한족 동네에서 사는 그는 그런 정보를 몰랐다. 한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부터 그는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억척같이 일을 했다. “어떻게 하든 한국에 가자.” 3년 만에 돈을 모았다. 언니는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다. “내가 지금 네가 오면 살 남자까지 다 봐두었으니 빨리 오기만 해.” 브로커 일행에 합세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무사히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17년 7월 한국에 도착한 그는 그해 12월 경남 창원에 자리를 잡았다. 언니가 봐두었다는 남자는 언니 남편의 친구로, 경남 산청에서 아들을 키우며 딸기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북한과 중국에서, 그가 40년 넘게 살았던 여러 농촌과 탄광들에서 이렇게 친절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남성은 본 일이 없었다. 함께 산다는 결심을 내리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한국에 정착하자마자 산청에 자리 잡았다.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느라 3년 동안 허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한국에서 6000위안이란 돈은 큰돈도 아닌데, 언니가 먼저 돈을 좀 보내주었으면 3년 일찍 왔을 텐데 지금도 두고두고 아쉽다. 남편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고, 여동생만 다섯 명을 둔 외아들이었다. 산청에 오니 제사를 1년에도 5~6번이나 지내야 했다. 3년 전에 돌아간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앞으로 힘들 것이라며 제사를 절에 맡겼다 오션파라다이스동영상 . 그래서 이젠 제사상을 차리지 않아도 돼 너무 행복하다. 김 씨는 산청에서 사는 삶이 뒤늦게 찾아온 선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 행복하다. 그의 입에선 자랑이 거침없이 나온다. “남편은 저에게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성격 급한 저를 다 받아줘요. 허리 때문에 서울 병원에 올 일이 있으면, 싫은 내색 한 번도 하지 않고 운전해 올라와요. 정말 보살님이 따로 없어요. 우린 싸워본 일이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나에게 왔을까요. 딸기 농장은 또 어떻고요. 저는 처음 딸기 온실을 볼 때 심장이 떨렸어요. 평생 남의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했는데, 내 땅을 가지다니요. 딸기가 많이 나올 땐 하루에 400박스씩 수확해요. 엄청 힘들죠. 그래도 아무리 힘들어도 탄가루가 꽉 찬 갱도에서 하루 종일 석탄 배낭을 나르던 거에 비하겠습니까.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며느리 자랑을 얼마나 하고 다니셨는데요. 이 나이에 제가 부모 복을 다시 본 것 같았어요. 시누이들은요. 저보다 나이가 많아도 저를 언니라고 정말 존중하고 잘해줘요. 이렇게 화목한 집안이 어디 있을까 싶죠. 아들도 새엄마한테 너무 잘한답니다. 딸기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데, 정말 성실하죠. 서울에서 공부하는 여동생도 참 잘 챙겨줍니다. 용돈 달라고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자기가 챙겨줍니다. 작년에 홍수로 피해를 보는 바람에 결혼 일을 잡아놨다가 2년을 미뤘는데, 아들까지 장가를 가면 근심거리가 없죠. 중국에서 데려온 딸은 20세인데, 키가 177㎝이나 된다니까요. 정말 늘씬하게 잘 컸고, 비행 승무원이 되겠다고 모 대학 항공서비스 학과에 다니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이대로만 살다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년 전 남편과 함께 남해 바다를 찾았다. 둘은 늘 붙어 다니는 믿음직한 동반자이다. ●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삶 김 씨는 지금의 삶이 정말 꿈만 같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늦복을 타고 난 여자”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행복은 그냥 찾아오진 않는다. 김 씨 역시 행복을 지키기 위해 힘이 닿는 한 열심히 헌신하고 있다. 농사는 몸만 열심히 써서 되는 일이 아니다. 딸기 농사를 배우기 위해 늘 공부했고, 올해도 산청농업대학에 다니며 선진적인 작물 재배를 배우고 있다. 시어머니를 모실 땐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고, 자동차 면허증도 땄다. 손이 모자랄 때면 외국인 노동자도 쓰는데, 올해도 온실에 온 3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가르치는 일은 그의 몫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은 더 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중국어를 활용해 보고 싶다. 허리가 아파 힘든 육체적 일을 하기 힘들면, 부산에 가서 중국인 가이드 일을 해보고 싶다. 그래서 가이드 자격증을 어떻게 딸 수 있는지 열심히 챙겨본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도 부지런하고 늘 웃으며 다니는 그를 보면서 “우리 집에도 자네와 같은 북한 여성을 좀 중매 서주게”라고 부탁을 한다. 산청의 탐나는 며느리가 된 그에게 다른 탈북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탈북민의 대다수는 여성이고, 또 결혼해야 할 겁니다.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탈북민은 한국의 가족과 맞추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라고 늘 웃기만 했겠습니까. 혼자서 울 때도 많았지요. 그런데도 그걸 다 극복한 것은, 사람에겐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죠. 내가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있다면,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농촌에 정착하는 탈북 여성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저는 무조건 시댁에 충성하며 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암만 잘난 척해도 실은 배울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서러운 일이 있어도 상대가 잘해주던 때를 떠올리며 견디면, 꼭 보답이 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보면, 어느새 우린 그 가정과 마을과 하나가 돼 있는 거죠. 저는 아이들에게 늘 말합니다. ‘항상 머리 숙이고, 감사하면서 살아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저는 매일 눈을 뜨면 맨 먼저 ‘감사합니다’부터 떠올립니다. 어제를 살게 해주어 감사하고, 오늘이 있게 해주어 감사한 것이죠.” 이런 감사의 마음이 지난해 모든 것을 앗아간 홍수 피해 속에서도 다시 우뚝 서게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올해도 안심할 순 없다. 올해 경남 산청은 폭염 때문에 저수지가 말라 급수 제한까지 하는 상황에 처했다. 작년엔 물난리, 올해는 가뭄 난리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엄혹한 자연재해도 김 씨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 가진 못했다. “폭염 속에서 하루가 지나가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입추가 지날 때 감사한 마음이 더 컸어요.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고, 추위를 견디면 더위가 오는 것이 자연 이치 아니겠습니까. 올해 폭염도 이제 지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죠. 작년엔 한 해 농사를 망쳤지만, 올해는 딸기를 수확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fu&wr_i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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